지난 6월 서울의 한 기아자동차 영업점은 성대한 축하파티를 벌였다. 소속 영업사원들의 활약으로 'K9'<사진>의 가계약 건수가 전국지점 가운데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달 공개된 내부 실적발표에 따르면 이 지점에서 실제 소비자와 맺은 실계약 건수는 전체 10위권 밑이었다. 가계약이 실제 출고로 이어지는 비율이 39%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지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현대차그룹은 딜러들에게 15만원 상당의 '기프트신용카드'까지 내걸며 K9의 영업을 독려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고 거품실적이라는 부작용만 키운 꼴이 됐다.
# 며칠 전 한 기아차 영업점을 찾은 사업가 옥정주씨(34·서울 행당동)는 직원에게 K9의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신차가 나온지 3개월도 안 됐는데 지난달 생산한 차량을 100만원이나 싸게 살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옥씨는 "기아차에서 5월 이전에 만든 새 차를 500만원까지도 깎아준다고 해 이해하기 어려웠다"며 "물량조절이라 하더라도 할인폭이 너무 커 오히려 차에 대한 믿음이 줄어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기아차의 야심작 'K9' 판매에 비상이 걸리며 정몽구(74·사진) 현대차그룹 회장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기아차는 2008년 프로젝트명 'KH'로 연구·개발을 시작해 55개월간 총 5200여억원을 투입, 지난 5월 K9을 출시했다.
정 회장의 K9 사랑도 각별하다. 신차 개발 단계부터 "한국차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자동차를 만들라"는 주문을 했고 "정성을 다한 만큼 판매가 잘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출·퇴근 및 공식·비공식 행사에 항상 K9을 이용해 신차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K9에 대한 시장반응은 차갑다. "수요의 절반을 가져오겠다"며 정조준했던 BMW나 메르세데스-벤츠 등의 수입차 판매량에는 변함이 없고, 대형차 시장 판도에도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기아차는 지난주 임직원과 업계 관계자들을 소집해 'K9 마케팅 비상대책회의(가칭)'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K9이 수입 프리미엄 세단의 수요 50% 가져온다"··· 결과는?
기아차는 K9 출시와 함께 매달 2000대씩 올해 국내에서만 1만8000대를 팔겠다고 밝혔다. 신차는 5월 1500대의 판매량을 보이며 불안한 출발을 했고 6월에는 1703대로 회복세에 접어든 듯 했다. 하지만 7월 1400대로 떨어졌고 최근에는 영업현장에서의 사전계약도 매우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K9의 도발을 지켜봤던 BMW나 메르세데스-벤츠는 수요이탈이 없다. 기아차가 성능의 우위를 장담했던 BMW 7시리즈나 벤츠 S클래스는 물론, K9과 비슷한 가격대의 BMW 5시리즈 및 벤츠 E클래스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BMW 5시리즈(502d+528i)는 5월에 전월대비 판매량(1301대)이 오히려 18% 늘었고 물량이 부족해 공급차질을 빚은 6, 7월에도 각각 755대, 671대의 실적을 올리며 선전을 이어갔다. 벤츠 E클래스(E300+E220) 역시 △5월 731대 △6월 710대 △7월 638대로 판매량에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간섭효과 우려하던 제네시스, "동생 고마워"
정의선(42) 부회장은 K9 출시 전 현대·기아차 임직원들을 불러 함께 신차를 모니터링 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수익이 줄더라도 K9의 가격은 제네시스<사진>보다 높고 에쿠스보다 낮아야 한다"며 "여러분은 K9이 최고의 차라는 점만 열심히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간섭효과의 피해는 오히려 K9이 보고 있는 모양새다. 제네시스는 K9이 출시된 5월에 1295대가 팔리며 부진했지만 2013년형 모델이 나온 6월(1784대)에는 전월보다 37%나 실적이 향상됐다. 7월에는 1620대로 올 1~4월 평균 판매량인 1569대를 웃돌았다.
업계 관계자는 "제네시스는 K9과 똑같은 V6 3.3·3.8을 장착하고 인텔리전트 내비게이션, 후방카메라 등 고급사양을 전 모델에 기본 적용해 소비자의 마음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2013년형 제네시스가 기존 모델에 옵션을 달았을 경우보다 오히려 낮은 대당 4390만~6470만원의 가격에 출시된 것도 인기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나는 누굴까?"··· K9의 애매한 포지셔닝 & 차심(車心) 읽지 못한 마케팅
전문가들은 K9 부진의 가장 큰 원인으로 마케팅상의 애매한 세그먼트를 지적한다. 형제차인 제네시스, 에쿠스 등에 간섭효과로 피해를 줄까 걱정했지만 실제로는 그 역풍을 맞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가격이 비싼데 그 폭도 5000만~8000만원으로 너무 넓어 기아차의 기함(플래그십)모델이라는 상징성이 퇴색됐다"며 "주요 고급사양이 없는 K9 기본모델을 사느니 소비자들은 제네시스나 에쿠스를 택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기아차가 K9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홍보하며 가장 많이 언급한 헤드업디스플레이(HUD)는 400만원에 달하는 하이테크 패키지에만 적용된다.
기아차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 부회장의 지시대로 에쿠스와 제네시스 사이의 포지셔닝이 중요했지만, HUD를 가죽재질의 부품으로 감싸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가격책정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기아차가 BMW·벤츠 등 수입 브랜드의 수십 년간 축적되온 기술과 감성을 너무 쉽게 봤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김 교수는 "기아차에 제일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며 "이제 국내 소비자들은 단순히 첨단기술만 모아놓은 차에 열광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전문가 못지 않은 안목을 갖춘 최근 소비자들의 차심(車心)을 끌기 위해서는 자동차에 담긴 장인정신과 브랜드 이미지 등의 감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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